1절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아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둘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이 노래를 알게 된 계기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마광수 교수님 때문이다.
마광수 교수님께서 어느날 조영남씨 댁에 초대를 받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대저택이라고 하셨다. 그 집에 갔더니 모델 처럼 늘씬한 미녀들이 곁에 있었고, 집도 으리으리하게 크고 좋아 보여서 부러웠다고 하셨다.
조영남씨는 그의 재산을 그가 죽을 때 그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줄 거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말을 전해 들어서 그런지 모란동백 노래를 감상하다 보면 외로움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정작 이 노래를 작사한 분은 이제하씨라고 한다.
나도 이제 세상 사는 일이 모란동백 노래 가사처럼
세상은 바람불고 고달파진 건가?
어젯밤에는 모란동백을 계속 반복해 들으면서 삶의 쓸쓸함을 공감했다고나 할까.
노래를 계속 듣다 보니 노랫말이 입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 있다. 노랫말을 적어 보았다. 모란의 모,자 처럼 ㅗ, ㅛ 모음이 1절에 열 여덟 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2절에는 열 아홉 번이 들어 있다. 1절과 2절에 다른 부분이 있는데 1절에는 '어느 나무 그늘에', 2절에는 '어는 모랫벌에' 부분에서 2절 모랫벌의 '모' 가 한 번 더 들어 가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란동백 노래를 배우려고 할 때 입에 착 감기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도로에서 운전을 하다가 높은 턱을 넘을 때 덜컹 하는것 처럼.
어느 '변방'이 그랬고, '어느 '나무 그늘'에가 그랬다.
변방은 옛날 무협소설 같은 글에 나올법한 단어 처럼 느껴졌고.
나무 그늘에는 나무 그늘 하면 나무 그늘 아래가 들어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느낌은 순전히 개인적이 습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은
'꿈 속에 찾아 오네' 에서 보편적으로 ' 꿈속에 찾아 오네' 보다 ' 꿈속에 떠오르네' 를 많이 표현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이 부분을 보면 나 같은 사람은 성격이 수동적인이고 체념이 빠른 것인가 하는 생각도 스쳐지나갔다.
나의 표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2절 '꿈속에 웃고 오네' 부분은 가사가 입에 붙지 않아 노래를 부를 때 마다 더듬거리게 되었다. 이제는 거의 다 외워서 부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다. 어는 시골길을 편안하게 운전 하다가 생각지도 않은 높은 턱에 부딪혀 덜컹, 소리를 내지 않을지 자신은 없다.
2017년에 고인이 되신 마광수 교수님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마광수 교수님을 그리워 하다가 마광수 교수님과 인연이 있었다던 조영남씨가 떠올랐고 모란동백 노래가 잠들기전까지 나와 함께 하게 되었다.

아쉽지만 모란꽃이 아니다.